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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건넨 만년필 한 자루, 그 후로 생긴 일

by dodo4471 2025. 7. 22.

할머니가 건넨 만년필 한 자루, 그 후로 생긴 일
평범했던 어느 날, 오래된 장롱 속에서 꺼낸 듯한 만년필 한 자루가 나의 일상에 작고 깊은 물결을 일으켰다.
할머니가 내게 조용히 건네주신 그 필기구는, 단지 글씨를 쓰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의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 하고, 잊고 지냈던 감정들을 꺼내게 하는 문이었다.
그 후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의 하루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건넨 만년필 한 자루, 그 후로 생긴 일
할머니가 건넨 만년필 한 자루, 그 후로 생긴 일

낡은 만년필에 담긴 마음

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자주 말씀하셨다.
“글은 손으로 써야 마음이 담기지.”
그때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다. 늘 키보드와 스마트폰을 이용해 빠르게 쓰고 지우는 데 익숙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겨울날, 갑자기 할머니가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셨다.
"이거, 네 외할아버지가 쓰시던 만년필이다."

검은색에 은색 줄무늬가 섬세하게 들어간 만년필. 군더더기 없이 클래식한 그 자태는 묘하게 사람을 정숙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잉크는 없었지만, 펜촉에 오래된 손때와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너도 이걸로 뭔가 써봐. 마음이 좀 달라질 거야."
그 말이 그렇게 마음에 남을 줄 몰랐다.

그날 이후 나는 문구점에서 병 잉크를 사고, 종이질 좋은 노트를 샀다. 그리고 만년필을 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첫 글자를 눌렀다.
‘오늘의 기분: 차분함.’
처음 쓴 문장이 그랬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만년필로 쓰는 글씨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따뜻했다.

 

만년필이 이끈 느린 글쓰기의 시간

컴퓨터 자판보다 훨씬 느리게 써야 하는 만년필은 생각보다 불편했다. 하지만 그 ‘느림’은 오히려 내게 선물 같은 시간을 안겨줬다.

천천히 써야 하니, 문장을 떠올리기 전 먼저 생각을 해야 했다.
무심코 쓰던 말들도 곱씹어보게 되었고, 마음속에 있는 진짜 감정을 들여다보게 됐다.

나는 매일 밤, 하루를 돌아보며 노트에 글을 썼다. 처음엔 단 한 줄이었지만, 며칠 지나자 한 페이지가 되고, 나중엔 몇 장이 되었다.

글을 쓰며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다. 잊은 줄 알았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 첫 연애의 풋풋한 감정, 엄마에게 말 못했던 고마움 등. 만년필은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해주는 ‘열쇠’였다.

그리고 그 글들은 어느새 나만의 작은 에세이 모음집이 되었다.
디지털로 복사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손글씨의 온도. 그것이 주는 위안은 생각보다 컸다.

 

글을 쓰며, 나를 다시 만나다

만년필을 통해 글을 쓰면서, 나는 나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하게 됐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싶지?"

그런 질문들 앞에서 머뭇거리며 써 내려간 글은 어느새 나의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꿔주기 시작했다.

출근 전에 10분간 짧게 글을 쓰는 습관은 하루를 가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힘든 날엔 "오늘 조금 힘들었다."고 쓰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때론 손글씨로 편지를 써 친구에게 보내보기도 했다.
받는 사람보다 쓰는 내가 더 감동을 받는 경험이었다.

지금은 이 만년필이 단지 할머니의 물건이 아니라, 나와 할머니를 잇는 연결고리이자,
내 삶의 중심을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보게 해주는 ‘사색의 도구’로 자리 잡았다.

어쩌면 할머니는 만년필을 통해 단지 글을 쓰라는 의미만을 전하려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과 자신을 너무 빠르게 소비하지 말고, 잠시 멈춰 돌아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저 오래된 펜 하나였지만, 나에겐 새로운 삶의 속도를 알려준 고마운 선물이 되었다.
당신도 혹시, 서랍 어딘가에 오래된 만년필이 있다면 꺼내보시길.
그것이 당신의 오늘을 조금 다르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